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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여성클럽

다른나라 대입 경험 대조 |Cut the cord 뉘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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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할리데이 아주머니께서

베트남에 오게 된 사연은

다른 주재원과 달랐습니다.

 

마흔네살에 베트남 아기를 입양하셨대요.

이제 고등학생이 된 

딸의 입시 때문에

세상 반대편까지 오게 되셨대요.

아이가 스탠포드에 가고 싶은데

성적이 안 되었나봐요.

IB 가점을 받으면 승산이 있어

딸의 모국을 경험해 볼 겸

둘이 태평양을 건너왔답니다.

딸이 베트남 고아 출신이기 때문에

비자가 수월하게 나왔대요.

북클럽날 즐겁게 말씀하시는 할리데이아주머니

그런데 복병이 아주머니의 건강.

물갈이를 심하게 하셨나 봐요.

하노이의 매연과 위생 때문에

캘리포니아 출신 Holiday 아주머니께는

호흡기 질환과 장염으로 크게 고생하고 계셨어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이 많으시더군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딸이 스탠포드 장학생 대상이 아님을

최근 아셨나 봐요.

아주머니께서 임대소득자라서.

너무 불공평하다고 성토하시네요...

 

딸을 맡아 줄 현지 가족을 물색하여

반년 정도 하노이에 두고

본인은 먼저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셨으나

UNIS에서 불허하여 수포로...

 

홍콩 과기대도 잠깐 대안으로 생각했으나

딸을 아시아에 두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시대요.

이 대목에서 다른 외국아주머니들은

"You don't want to cut the cord"라며

눈을 굴렸습니다.

미드에 보면 많이 나오는 거 있잖아요

roll your eyes ㅋㅋ

이것도 매우 미국스러운 표정이죠.

참고로 여기서 Cord

탯줄 같은 끈입니다.

하노이에서 미국 대사관 변호사네가

쓰는 것도 봤어요.

결국 내보낸 하우스키퍼와

진작에 Red flag가 있었을 때

"Cut the cord" 할걸, 후회하면서...

 

다시 할리데이 아주머니 이야기로 돌아가서.

엄마 입장은

"She was a difficult child to raise.

I made a lot of sacrifices.

I won't stand in the way.

But I'm not going to make it happen."

가장 예민한 고3 입시를 보내고 있는

입양 가정의 진솔한 모습...

그리고 국적 불문

입시에 엄마의 정보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 간접 체험하였습니다;;

Farewell Luncheon, Feb 2015

아주머니께서는 결국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셨어요.

환갑이 넘은 나이에

고도의 검색력을 자랑하는 

할리데이 아주머니께서 

고등학교 졸업장 없이도

대학 갈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내신 것이었어요.

검정고시
(California High School Proficiency Test라나...)

를 치고 유명 4년제 대신

쥬니어 칼리지에 진학하기로 했대요.

 

어쩌면 소기의 성과(국제학교 졸업장)를

거두지는 못했으니

뻘짓한 건가 싶을 수도 있겠지요.

재수를 했으면

전년도보다 높은 점수대의 학교에 붙어야 한다는

우리 사고로 보자면요...

 

어쩌면 수험생을 데리고

제3세계로 온 것이
너무 큰 리스크였을지도 몰라요.

유엔국제학교 적응이 쉽지만 않았던 것 같아요.

쭈욱 국제학교만 다닌 아이들 사이에서요.

 

하지만 결국 "학교를 못 갔다"가 아니라

"피와 살이 되는 경험을 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고가 부러운 것을 수도요.

이러한 저러한 비주류여도 

창의적인 안을 고안할 수 있는
제도도 부러운 것이구요.

 

한국 입시와 공통점이라면

엄마의 정보력과 의지에 

크게 좌지우지되었다는 부분입니다.

물론 할리데이 딸은 씨니컬하고

본인 의견이 강한 전형적 십대소녀.

할리데이는 베트남에 가자는 것부터

딸이 본인 아이디어라고 여기도록

(나쁘게 보면) manipulate 했다고 해요.

 

캘리포니아 지근거리에 살며

네 몫으로 만들어 놓은 돈을

비싼 4년제 대학 등록금으로 소진하기 보다

네 첫 집 보증금으로 줄게,

라는 미국 엄마의 실용적 뜻이 

관철된 것이라는 걸

딸은 완전하게 인지하지 못한다고 

가식이 1도 없는 아주머니께서

담백하게 말씀하십니다 ㅎㅎ

아이들 보고 싶어 코로나 정국에 SRT 특실 타고 상경하신 외할머니

생각해보면 저도 그렇습니다.

이해찬 1세대라고 불리우는 저희 학번은

고등학교 진학하던 해에

김대중 정부에서 이해찬 교육부 장관이

"하나만 잘해도 대학 간다"를 표방했어요.

그 여파는 아직 비평준화였던 울산에서

가장 좋은 여고는 미달이 나는 상황.

내신이 중요해진다는 이야기와 함께

내신 손해 보는 울산여고를 기피한 것이죠.

지방 공립학교는

나랏님 정책을 착실하게 따랐고

저희는 고1~2 동안은

야자 한번, 모의고사 한번 쳐보지 않았습니다. 

 

고3 봄날에 치른 첫 모의고사 성적은

형편없었습니다.

원래 약한 수리 부터

전 영역 전멸이었던 것 같아요.

서울대 나오신 부모님처럼

막연하게 같은 학교 걸어 들어간다고 했던

생각이 산산조각 난거죠...

 

왜 수학 과외를 제대로 시켜주지 않았냐고

괜한 엄마를 잡으며 원망했는데,

네가 학교 수학 정도는 따라갈 줄 알았다는

안타까운 답변이 아직 생생합니다.

그래서 방향을 확 틀어

수능을 버리고 영어로 대학가 보기로 

고3 1년을 남겨두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2001년만해도

울산에는 특시/특례 이런 전문 학원이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확대 실시되는
수시전형을 노리는 거였는데,

해당 학원, 과외 교사도 당연히 전무.

제게 영어를 가르칠 만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자부심 있는 한 가지는

제가 서점에서 고른 영어 문제집으로

제가 제 영어를 쌓았다는 점입니다.

영어 하나 잘해서 먹고사는

제 인생은 그때 굳혀졌고

학부 졸업 후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을 선택하면서

시멘트 발랐습니다.

 

TEPS, TOEIC, TOEFL 위시하여

갖가지 영어인증시험 치고

영어경시대회 문을 두들겼습니다.

경시대회 성적은 지지부진.

저의 한계임을 사실 그때도 알았어요.

그래도 환경 탓도 좀 해보았습니다.

저는 우리 학교에서 혼자 왔는데,

경시대회장에서 보는 특정 교복 군단들.

서울의 여러 외고 아이들이었습니다.

또 대회장에는 으레

전문 학원 팸플릿을 나누어주고 있었어요.

그 상대적 박탈감도 컸습니다.

 

언제였나...고3 막바지였는데

"엄마 때문에~" 울었던 것이

아직 마음에 걸립니다.

혼자 영어 공부한다며

교실 맨 뒤에 앉아서
수업 귓등으로 듣고 있었지만

교과 과정이 한 번 쭈욱 다시 복습되니

내신형 금붕어 머리인 

저의 모의고사 성적으로 꽤 올라

경쟁력이 생기는 반면

경시대회 입상 성적은 초라할 뿐 아니라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는 절망감이었어요.

 

수능 날.

단군 이래 최저학력이라 불리게 된 02학번은

너무 어려운 출제 지문과 맞닥뜨렸어요.

학교장추천전형으로

고려대 문과대학을 붙여 놓고

수능 2등급만 받으면 되는 저는

변별력이 케 높아진 시험 덕에

수리영역까지 1등급이 나오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튿날 담임 선생님께서는

서울대 영문과를 노려보라는 바람을 넣으셨지만

원체 간이 콩알인데다가

경시대회다, 심층면접이다, 할 때마다

서울 올라가는데 지친 저는

수시 등록일을 놓쳐 

재수하는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수시 등록하면

정서 원서는 못 넣도록 제도가 정비된 듯 합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어머니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네요.

엄마는 치열하게 객관적으로

저의 약점과 강점을 파악해주셨고

대한민국 수험생이면 겪어야 하는

한 방에 쇼부보는 부담을

덜어주셨는데도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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